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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지 감수성'에 관한 몇가지 오해

  • 작성자권정임
  • 등록일2021-06-06 22:20:57
  • 조회수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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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지 감수성'에 관한 몇가지 오해

한겨레 2021. 05. 24. 09:46

[세상읽기]  류영재 ㅣ 대구지방법원 판사

2018년 대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을 판시한 이래 3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성인지 감수성’은 논쟁적 개념이다. 성인지 감수성을 둘러싼 논쟁이 발전적으로 검토되기 위해서는 몇가지 오해의 불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1. 피해자 진술은 증거가 아니라는 오해

가장 대표적인 오해다. ‘피해자 진술은 한쪽 당사자의 일방적 주장일 뿐 형사재판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틀렸다. 피해자는 범죄를 직접 겪은 자로서 범죄자와 범죄 경위, 범행 그 자체, 범죄 현장 등을 가장 자세히 기억하고 진술할 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피해자의 범죄사실 진술은 직접증거로 인정된다.

피해자는 피의자의 반대쪽에 서 있는 대립 당사자에 불과한데 그의 진술을 증거로 삼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여겨지는가? 그러나 피해자의 진술을 범죄의 직접증거로 삼는 것은 성범죄에 국한되지 않는다.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를 제외한 모든 범죄에서 피해자 진술은 범죄 입증에 필수적인 증거가 된다. 사기 사건을 떠올려보자. 피해자가 피의자에게 돈을 건넨 뒤 되돌려받지 못했다는 것만으로 사기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왜 돈을 건넸는지, 돈을 준 뒤 피의자가 어떤 이유로 돈을 되돌려주지 않았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진술이 필요하다. 성범죄에서 디엔에이(DNA) 검사 등으로 성관계를 가진 사실이 입증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합의된 성관계인지 강제된 성폭력인지 살펴보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진술이 필요한 것과 유사한 구조다.

다른 범죄에선 피해자 진술을 뒷받침하는 카카오톡, 시시티브이(CCTV) 등이 등장하는데 유독 성범죄에서는 피해자 진술밖에 없지 않으냐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성범죄 사건에서도 여러 정황증거(디엔에이 검사, 상해진단서, 카카오톡, 영수증 등)가 등장한다. 범죄 장면 자체를 촬영한 시시티브이나 제3자 목격 증언 등이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성범죄는 공개된 장소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범죄이기 때문에 범행 자체를 촬영하거나 목격한 증거들은 발견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특성은 성범죄뿐만 아니라 가정폭력 범죄나 뇌물 범죄 등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제3자가 없는 은밀한 공간에서 일어난 범죄의 입증은 대부분 피해자 등 범죄 당사자의 진술 증거에 의존하게 된다.

2. 이성이 아닌 감수성으로 판단한다는 오해

대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이란 표현을 사용하면서, 법원이 성폭력 사건에서 사실인정을 할 때에는 이성이 아닌 감수성으로 판단하게 되었다는 오해가 발생했다. 그러나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구체적인 판시를 살펴보면 대법원은 특별한 변화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성 대신 감수성으로 판단하라고 하지 않았다. 피해자의 감정을 중시하거나 또는 피해자를 무조건 믿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단지 사실을 인정할 때 성인지적 관점에서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여 섬세히 판단하고 피해자다움에서 비롯된 선입견과 편견을 배제하라고 요청했을 뿐이다.

지금껏 법원은 성범죄 재판을 할 때 ‘피해자가 즉시 신고를 했는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사죄를 요구하거나 인연을 끊었는지’ ‘피해자의 일상이 무너졌는지’ 등을 살펴 기계적으로 피해자 진술의 참과 거짓을 판단하여온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성폭력은 지인으로부터 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많은 피해자들은 일상을 영위하고 2차 가해를 피하기 위해 신고를 하지 않거나 가해자와 인적 관계를 계속 유지한다. 그럼에도 성폭력 발생 시 즉시 신고하고 가해자와의 인연을 청산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실에 어긋나는 편견과 선입견이다.

정리하자면, 대법원의 ‘성인지 감수성’ 판시 이후에도, 여전히 성범죄 재판은 증거재판주의와 무죄추정의 원칙 아래 운영된다. 검찰에 유죄 입증 책임이 주어지며 피해자의 진술은 직접증거로서 신빙성 판단을 위한 검토 대상이 된다(따라서 법원이 마냥 피해자 진술을 믿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기에 시민사회는 법원에 사실인정의 근거를 따져 물을 것이고, 법원은 그에 답하여 정확한 사실인정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만 그 여정에 ‘성인지 감수성’의 폐지 및 편견과 선입견으로의 회귀가 자리하진 않을 것이다. 성인지적 관점 결여로 인한 맥락의 소거, 피해자다움의 활용은 진실 발견을 방해하는 퇴행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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